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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그 외

사랑 어디까지 해봤어? [세기의 로맨스 에드워드 8세와 심슨부인]

"당신은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포기할 수 있나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세상을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랑을 하면 나보다 상대방을 더 생각하게 되고 나의 기분이 그 사람의 작은 말이나 행동 하나에 좌지우지 되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가 라는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음..."

 

 

나는 사랑을 위해 헌신도 해봤고 열정을 쏟기도 해봤다. 물론 사랑을 위해 포기한 것도 있지만 자랑스럽게 "**을 포기했어요." 라고 할만건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상대방을 위해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감수하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딱 그정도이다.

 

 

 

 

 

 

 

 

하지만, 현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삼촌 에드워드 8세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사랑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소."

 

 

1894년 영국의 왕 조지  5세와 메리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난 에드워드 8세는 수려한 외모와 재치있는 언변으로 당대 영국 최고의 매력을 자랑하는 왕세자였다. 심지어 패션 감각 까지도 뛰어났는데 168cm의 작은 키를 보완하기 위해 평소 옷 입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썻던 그는 현재까지도 남성복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중 하나로 꼽힌다. 에드워드 8세는 '윈저노트' '윈저 칼라셔츠' '글렌체크 슈트' '트위드 자켓' 등 일명 '윈저공 스타일'을 널리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해군 생활은 사내가 받을 수 있는 최상의 교육이다."

 

 

어린 시절부터 조부 에드워드 7세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온 에드워드 8세는 조부의 교육 방침에 따라 동생 앨버트 왕자와 해군 장교로 임관하여 오스본, 다트머스의 해군 사관학교, 옥스퍼드의 막달렌 칼리지를 거쳐 충실히 국왕 후계자 교육을 받았고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강한 근성과 남다른 모험심을 타고난 에드워드 8세는 전방에서 근무하고 싶어 했지만, 왕세자의 안위를 우려하여 왕실근위대에서 근무할 것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최대한 전방에 접근해서 근무했고, 병사들의 참호를 수시로 방문하는등 그의 모험심을 가둬둘 수는 없었다. 덕분에 그는 1916년 전공십자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1918년에는 첫 군사 비행을 하고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답답한 왕실을 벗어나고 싶다."

 

 

대영제국 당대 최고의 인기남이였던 왕세자 에드워드 8세는 여성 편력이 심했는데, 그는 연회에서 여러 유부녀와 염문을 즐기는 바람둥이로 유명했고 유부녀인 프리다와 오랜 연인관계였다고 한다. 당연히 왕실에서는 그런 그의 모습을 탐탁치 않아 했고, 본래 자유분방한 성격에 반항아 기질을 타고난 그 역시 평소 영국의 군주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한다. 그러던 어느날, 파티장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이 그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왕세자인 그에게 '경'이란 존칭은 절대적이였으며, 왕족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심슨 부인은 달랐다. 왕세자와 가까운 친구들이나 가족들만 부르던 데이비드라는 호칭을 스스럼 없이 부르고, 그를 왕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8세는 그런 심슨부인의 태도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녀의 매력에 반해버렸다.

 

 

 

 

 

 

 

 

"불꽃 같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훗날 윈저 공이 된 왕세자 에드워드 8세는 심슨 부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심슨 부인은 당시 한 번의 이혼을 거쳐 어니스트 앨드리치 심슨과 재혼한 상태였지만, 에드워드 왕세자는 활발하고 세련되며 위트 넘치는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들의 만남이 계속되던 1936년 1월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서거했고 왕세자는 에드워드 8세라는 호칭으로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자유분방한 성격과 탁월한 패션 감각으로 인기가 높던 에드워드 8세와 심슨 부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자자했다. 영국 왕실과 의회, 국민에게 그녀는 국왕을 현혹시킨 공적이었고, 결코 대영제국의 왕비가 될 수 없다고 여겨졌다. 에드워드 8세는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심슨 부인이 아니면 국왕의 자리를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는 국왕의 무거운 책임을 짊어질 수 없음을 알았다."

 

 

에드워드 8세는 국왕의 자리에서 고작 10개월 22일동안 재위를 했고 1936년 12월 11일, 국왕으로써 마지막 직무를 마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국왕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그때까지도 심슨 부인은 어니스트 심슨의 아내였고, 영국은 물론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퇴위한 에드워드 8세는 윈저 공작으로 신분이 하향됐고 영국을 떠나 심슨 부인의 이혼 절차가 끝나기를 기다려 1937년 6월 3일 프랑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은 16명에 불과했으며, 영국 왕실에서는 단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영국 왕실은 심슨 부인에게 작위는 물론 왕실의 격식에 맞는 어떤 호칭도 허용하지 않았고 그녀는 결혼 후에도 전 남편의 성을 따라 심슨 부인으로 불렸다.

 

 

 

 

 

 

 

 

"사랑을 선택한 대가"

 

 

에드워드 윈저 공은 대영제국의 왕위를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한 대가로 왕실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받았으며, 다시는 영국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명령 받았다고 한다. 에드워드 윈저 공과 심슨부인은 대부분의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냈으며 35년간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그 후 2년동안 고국에 돌아가기를 간청했지만 끝내 허락되지 않았고 에드워드 윈저 공은 1972년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제서야 혼자가된 심슨 부인을 버킹엄 궁전에 머물도록 허락했고, 현재 두사람은 윈저 궁 뜰에 나란히 묻혀있으며 두사람의 사랑은 전 세계에 세기의 로맨스로 남게 되었다.